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얄타 회담 (문단 편집) == 여담 == 원래 미영에서는 자기들에게 가까운 [[스코틀랜드]], [[몰타]]나 [[아테네]]에서 회의를 하자고 제안했으나 주치의의 권고에 따른 스탈린의 건강 문제로 소련이 거절했다.[* 사실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등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모습인데 이들은 절대 자국 및 인접한 우방국을 제외하면 멀리 안 나간다. 스탈린이 참석한 테헤란, 얄타, 포츠담은 소련령이거나 소련과 가까웠으며 비교적 멀리 있던 카이로 회담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덕분에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던 루스벨트는 의사와 동료들의 권고를 뿌리치고 4,883마일을 항해한 후 대통령 전용기로 1,375마일을 더 비행해 얄타에 도착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루스벨트는 회담 2개월 후인 그해 4월에 [[뇌출혈]]로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여기서 만난 정상 3인의 [[뇌졸중|사인]]이 동일하다.] 스탈린 역시 [[비행기]] [[여행]]을 극히 싫어했으나 [[공군]] 장성이 조종하는 수송기에 20여 대의 호위기 경호를 받으며 왔다. 소련 측도 루스벨트의 건강이 안 좋은 걸 감안해 나름대로 배려 조치를 하긴 했는데 회담 장소인 리바디아 궁전[* 원래 [[러시아 제국]] 시절 [[알렉산드르 2세]]가 황후의 건강을 위해 따뜻한 얄타에서 요양하라고 지은 별궁이다. 즉 숙소로 사용하기에도 원래부터 적합한 건물이었던 셈.] 안에 루스벨트의 숙소를 마련했고 나머지 두 명은 숙소에서 회담장 리바디아 궁전을 오갔는데 루스벨트는 회담 기간 동안 리바디아 궁전 안에서만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처칠은 근처의 보론초프 궁전에 묵었고 스탈린은 유스포프 궁전에서 회담장을 오갔는데 이 두 궁전은 제국 시절 [[귀족]]의 저택이라[* 보론초프 백작가와 유스포프 공작가의 저택이었다. 유스포프 공작은 [[라스푸틴]]을 처단한 [[펠릭스 유수포프]]의 가문이다. 물론 소련 시절에 다 몰수되면서 각각 컨퍼런스 홀과 호텔로 개조된 상태였다. 이런 별궁과 저택들은 지금도 [[얄타]]의 관광자원으로 남아있다.] 리바디아 궁전보단 조금 급이 낮았다. 회담은 8일간 계속됐는데 공식적인 만찬은 고작 3번에 그쳤다. 서로 한치도 양보 없이 조금이라도 자신들에게 이익을 위해서 엄청 살벌한 외교 전쟁이었고 이 공식 만찬도 살벌한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한 목적의 만찬이었다. 따라서 하하 호호 웃고 떠들면서 사교성이 넘치는 만찬 분위기와는 거리가 영 멀었다. 그런데 미국이 주최했던 첫 번째 연회와 영국이 주최했던 마지막 저녁 식사의 차이가 엄청났다고 한다. 첫 번째 만찬에서는 스탈린이 대접한 [[보드카]]와 [[캐비어]]가 나오기는 했으나 나머지는 미국측의 남부식 프라이드 [[치킨]]과 미트로프, [[코카콜라]] 등 탄산음료, 애주가인 루스벨트 대통령이 직접 만든 레시피의 자신작인 [[마티니]] 칵테일을 대접했는데 스탈린과 처칠은 별로 입에 맞지 않아서 환영받지 못한 칵테일이었다고 한다. 그가 만든 마티니는 엑스트라 드라이 마티니가 대세임에도 [[베르무트]]를 다량으로 첨가한 올드 클래식 타입의 마티니 레시피였기 때문이다. 반대로 영국 총리가 개최한 디너에는 홀스래디시 소스를 곁들인 청어와 연어회, 새끼 돼지 통구이 요리와 영국산 와인, 토끼고기 파이 등 영국 현지 특산 요리가 대부분이었다. 조지아인인 스탈린을 배려한 그 지역 특선 음식인 양고기 [[케밥]], [[샤슬릭]]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식 메뉴는 얄타에 문화적 충격을 남긴 반면 처칠이 제공한 메뉴는 개성 있는 영국 귀족의 우아함으로 남았다고 한다. [[프랑스]]가 하마터면 전승국으로 인정받지 못할 뻔했다. 회담 당시 스탈린이 프랑스가 독일에 일찍 항복하고 [[비시 정부|괴뢰 정부]]를 수립했다는 이유로 소련이 프랑스의 전승국 인정을 반대했기 때문이다.[[https://www.youtube.com/watch?v=StGytjHFvXM&t=1332s|관련 동영상]] 사실 미영이 소련에 많이 양보한 이유에도 3,000만이 살해당한 소련의 피해 상황에 대한 인간적인 동정과 더불어 자유주의 우방 프랑스를 전승국으로 올려야 한다는 정치적 계산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편 추축국과 선을 긋긴 했으나 연합국에 물자 지원 정도만 하고 있었던 [[이븐 사우드]]의 [[사우디아라비아]]는 연합국 핵심 3국이 UN 창설멤버 자격 조건으로 3월 1일까지 대독 선전포고를 한 국가로 못박는 바람에 형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